공부를 잘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공부 열심히 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오늘은 모두가 플래너였던 시절을 알아보자.
✍️ 플래너 하나에 담긴 ‘공부하는 나’의 로망
학창시절,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엔 누구나 한 번쯤 스터디 플래너에 꽂혔던 시기가 있다.
서점 문구 코너에 가면 ‘1일 1페이지’, ‘1주일 한눈에’, ‘시간 단위 기록용’ 등 다양한 플래너들이 줄지어 있었고,
각자 공부 스타일에 맞게 하나쯤은 꼭 골라 들고 다녔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플래너에 공부 계획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꾸미기였다!
표지를 스티커로 장식하고, 제목은 색깔펜으로 예쁘게 쓰고, 중간중간 동기부여 되는 명언까지 삽입.
"오늘 할 일: 수학 문제집 3쪽 → 성공하면 별 스티커 붙이기 ⭐"
이런 식으로 마치 게임처럼 미션을 설정하고, 성공했을 때의 뿌듯함을 맛보는 게 진짜 재미였다.
"공부보다 플래너 꾸미는 게 더 재밌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루의 반은 책상 앞에서 문제를 풀었지만, 나머지 반은 색깔펜을 고르고 레이아웃을 구성하는 데 썼다.
글씨를 예쁘게 써야 했기에 '한 글자라도 삐끗하면 처음부터 다시'는 기본이고,
중간중간 귀여운 일러스트나 도장도 필수 요소였다.
이렇게 완성한 플래너는 단순한 계획표가 아니라,
‘공부하는 나’라는 이상적인 이미지와 작은 성취감이 가득 담긴 예술 작품 같은 존재였다.
🖊️ 펜 하나에도 진심: 문구에 진심이던 시절
스터디 플래너를 꾸미려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펜 욕심이다.
문구점 앞을 지나가면 괜히 안 들어갈 수 없고,
새로운 색깔의 펜이 보이면 “이건 써봐야 해”라며 들고 나오던 시절.
사라사 젤펜: 부드러운 필기감과 예쁜 색감으로 인생펜으로 등극
하이테크C: 극세필의 정석. 작고 세밀한 글씨를 쓸 때 최고
형광펜: 형광 연두, 형광 핑크, 파스텔 톤까지… 각 색에 용도를 부여하며 구분
마일드라이너: 형광펜이지만 은은한 색감으로 필기 인테리어에 최적화
게다가 ‘공부 잘하는 사람 = 문구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공식이 생겨나면서,
필통 속 펜 종류를 보면 그 사람의 공부 성향까지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색깔별로 펜을 정리해 두는 것부터,
"제목은 보라색, 날짜는 하늘색, 포인트는 분홍색" 같은 나만의 규칙을 세우고
이를 플래너와 필기노트에 적용시키는 게 진짜 ‘공부 준비’였던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형광펜 배열 미학이다.
중요한 부분은 진한 색, 참고용은 은은한 색으로.
혹은 무지개 색 배열을 한 뒤 중요한 내용에 따라 색을 순환하는 식으로
공책이 마치 컬러링북처럼 예쁘게 꾸며졌다.
이런 노트나 플래너를 친구에게 보여주면 꼭 듣는 말,
“와 너 진짜 공부 잘할 것 같아…”
사실 내용보다는 디자인으로 칭찬받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도 웃픈 추억이다.
📚 공부냐 꾸미기냐, 그 사이 어딘가의 열정
“오늘은 플래너 꾸며야 해서 공부는 내일…”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이런 딜레마를 겪었다.
스터디 플래너는 공부를 잘하기 위해 만든 도구였지만,
어느 순간 ‘꾸미기’ 자체가 공부보다 더 큰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꼭 나쁜 건 아니었다.
플래너를 꾸미며 하루를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를 다시 체크하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예쁘게 적힌 플래너와 정돈된 필기노트를 보면
스스로 ‘나 꽤 괜찮게 살고 있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다시 내일의 계획을 세우는 에너지가 됐다.
또한 이 과정은 단순히 ‘꾸미기’나 ‘장식’이 아니라
자기 표현의 수단이었다.
누군가는 다꾸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누군가는 깔끔한 도표와 차트로 정리했고,
또 누군가는 글씨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자신만의 감성을 담았다.
요즘 말로 하자면, 일종의 공부 브이로그였던 셈.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오늘도 수고한 나’를 위한 작은 기록이자 응원이었던 것이다.
🎀 잊혀졌지만 지워지지 않는 손끝의 감성
요즘은 태블릿 필기나 공부 앱이 대세다.
플래너 대신 Google Calendar, 형광펜 대신 디지털 마커를 쓰고,
공책 대신 iPad와 Apple Pencil을 쥐는 시대.
하지만 때때로 종이 플래너와 펜을 꺼내고 싶을 때가 있다.
손으로 하나하나 쓰고 꾸며가던 그 시간 속에는
단순한 공부 기록 이상의 감정과 정성의 결이 있었다.
지금 다시 돌아보면, 스터디 플래너는
공부를 잘하려는 도구이자, 그 시절 ‘최선을 다한 나’를 증명해주는 타임캡슐 같은 존재였다.
그때 썼던 낙서 하나, 체크 표시 하나까지도 모두 나의 흔적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다.
혹시 지금도 오래된 플래너나 노트를 갖고 있다면,
한 번쯤 꺼내서 넘겨보길 추천한다.
그 안에는 수능보다 더 치열했던 나와의 싸움,
그리고 그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던 나의 색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