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TV 앞에서 기다리던 시청 문화

by 공 ; 훈 2025. 4. 20.

넷플릭스, 유튜브, 왓챠… 지금은 원하는 콘텐츠를 언제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대지만,
한때는 TV 편성표에 우리 삶의 리듬이 맞춰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은 리모콘을 차지하고 싶었던 그 시절을 알아보자.

 

TV 앞에서 기다리던 시청 문화
TV 앞에서 기다리던 시청 문화

🕰️ 본방사수를 위한 치열한 시간표 짜기


‘본방사수’라는 단어가 존재하던 그 시대엔, 보고 싶은 방송 시간을 기억하고
그에 맞춰 모든 일정을 조정하던 일이 아주 당연했다.

“야, 오늘 ‘논스톱’ 하는 날이야. 10시 전에 씻고 나와야 돼!”
“토요일 6시? ‘무한도전’ 봐야지, 약속 안 잡아~”

특히 주중에는 드라마, 주말엔 예능이 대세였다.
드라마가 끝나는 시간이 곧 ‘취침 시간’이기도 했고,
드라마를 보려면 광고까지도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또 본방송을 놓치는 건 단순한 ‘실수’가 아닌 사회적 패배감으로 이어질 때도 있었지.
다음 날 아침 등굣길, 친구들 사이에선 전날 방송 이야기가 화제였고
그걸 못 본 친구는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났었다.

“어제 그 장면 봤어? 와 미쳤다 진짜.”
“뭐? 안 봤다고? 야 너 대체 뭐 했냐…”

이 모든 감정은 단 하나, 본방을 사수했을 때의 희열로 보상받았다.
광고가 끝나고 다시 화면이 돌아오며 등장하는 주인공을 보며
우린 다시 또 그 화면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 리모컨 전쟁: 가족 간의 뜨거운 눈치싸움


TV 앞의 또 다른 전장은 바로 리모컨 전쟁이었다.
지금은 각자 스마트폰, 태블릿, 개인 TV로 조용히 각자 콘텐츠를 즐기지만
그 시절엔 거실 TV 한 대가 모든 가족의 ‘공용 극장’이었기 때문에
리모컨의 주도권은 곧 거실 권력의 상징이었다.

“엄마, 드라마 너무 길어~ 만화 틀면 안 돼?”
“오늘은 엄마 날이야. 다음 주는 네가 먼저 차지해.”
“아빠 야구는 제발 나중에 보세요!!”

아빠의 야구, 엄마의 주말 드라마, 누나의 아이돌 음악 방송,
그리고 나의 어린이 프로그램까지...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승자였다.
식사 후 누구보다 빨리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챙기거나,
“나 오늘 무조건 ‘토요특선극장’ 봐야 돼!”라는 강한 주장으로 선점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TV 시청 시간은 자연스럽게 가족 간의 커뮤니케이션 시간이 되기도 했다.
같은 장면을 보며 함께 웃고, 울고, 때로는 싸우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조금씩 알아갔고,
TV는 단순한 콘텐츠의 매개체를 넘어 하나의 정서적 공유 공간이 됐다.

 

📺 ‘주말 정주행’이라는 명예로운 의식


특히 주말은 TV의 황금 시간대였다.
토요일 저녁 ‘무한도전’, ‘세상에 이런 일이’, ‘TV 동물농장’,
일요일엔 ‘1박2일’, ‘개그콘서트’, ‘우리 결혼했어요’…
그 시간대는 말 그대로 온 가족 정주행의 시간이었다.

아빠는 팔짱 끼고 앉아 툭툭 농담을 던지고,
엄마는 손에 빨래를 들고 있지만 눈은 화면에 집중.
아이들은 바닥에 엎드려 웃다가, 어떤 장면에선 박수를 치기도 하고.

“어휴, 저 사람이 문제야~ 저런 성격이 문제라고!”
“아빠, 저 예능이야. 진짜가 아니라고~”
“근데 저 커플 진짜 잘 어울린다…”
“쟤네 다음 주에 뭐 할까?”

TV는 하나지만, 반응은 제각각.
한 화면을 함께 보고 서로 다른 감상을 나누며
그 시간은 우리 집만의 작은 영화제 같았다.

지금은 원하는 장면만 골라보고, 댓글을 보며 혼자 웃는 시대지만
그때는 방송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는 인내력과 집중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공유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 그 시절 TV는 콘텐츠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지금도 TV는 존재하지만,
그때 우리가 TV를 통해 누렸던 감정은 콘텐츠 그 자체보다는, 그걸 기다리는 시간과 공유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방송 시간을 기다리며 설레고,
누군가와 함께 보며 깔깔대고,
그 다음 날 학교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시절.

모두가 같은 방송을, 같은 시간에 보고 있었다는 것.
그건 단순히 콘텐츠 소비가 아니라,
공통된 추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리모컨 하나로 울고 웃던 그 시절,
‘본방사수’를 외치던 진지한 얼굴들,
그리고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우리 가족의 모습.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리고 가끔 TV를 켤 때,
그때 그 채널 번호가 문득 떠오르는 날이면
문득, 그 시절의 향수에 잠겨본다.